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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Coco (2018) 취향입니다존중해주시죠

시간과 결별한 이 땅의 모습은 시원의 시랍 같았다. 아실은 이성의 박탈감을 느끼며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을 세계. 문득 아실은 자신이 한 마리 무당벌레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이라는 밧줄 위를 걸어가는 조그마한 무당벌레. 밧줄의 뒤쪽을 일백 년, 그리고 앞쪽을 일백 년 정도 늘이면 작은 무당벌레를 찾는 것은 힘들다. 앞쪽을 일만 년, 뒤쪽을 일만 년 정도 늘인다면? 극히 드문 우연이 아니고선 무당벌레를 찾을 수  없다. 일억 년씩 늘인다면? 밧줄 위를 걷는 무당벌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무당벌레는 없다.
_ 이영도 『피를 마시는 새』 中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망자의 죽음을 기리는 그 절차들은 모두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고모들은 영정 앞에만 서면 서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울어댔다. 시작부터 끝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나로서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버튼을 누른 기계처럼 울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망자가 살아있을 때는 그 분의 얼굴과 이름조차 몰랐을 사람들이, 망자의 자녀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찾아와 부조를 하고 절을 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아는 사람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는 위로의 말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불길한 사후 해석과 결백한 작별" 사이에서 나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고를 테니까.

그러나 입관식을 위해 꽁꽁 동여맨 시신을 만져야 할 때는 나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천 너머로 느껴지는 딱딱한 촉감은 여기 살아 움직이는 모든 자들 또한 원래는 이런 모습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 죽음을 기린답시고 사람들이 이런 고생을 되풀이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가도 그 생각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죽으면 내 몸뚱이도 저런 무정물이 되어있을 텐데, 내가 죽은 다음 내 시체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하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작중에서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하는 영혼이 사라지듯이, 죽었기에 나에게 인식 받지 못하는 세계는 무의미하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그 다음은 없다.

아니, 없다는 단언은 너무 성급한지도 모른다. 나는 사후세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불가지론이라는 안이한 길을 택해야만 한다. 죽어서 제사를 받기 위해 살아서 제사상 차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무어라 말할 수 있으랴. 보르헤스의 말처럼 사후세계라는 믿음이 사람들에게 유익하다면 그 믿음을 함부로 부정하는 처사야말로 우행이 될 것이다. 장례라는 절차에 쏟아붓는 비용과 시간보다 산 사람들의 상실감을 달래서 얻는 이익이 더 크다면 장례를 허례허식이라고 무시하는 태도야말로 그릇된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말할 거리가 없다. 딱 하나, 기억 받지 못하는 영혼은 사라진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기억 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라져 버린다는 세계관은 흥미롭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기억 받아야만 한다는 작중 태도는 고루하게 느껴진다. 잊힐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시대, 정부가 전 국민의 생몰연도와 사진과 지문까지 모두 등록해서 기록해두는 한국이라 특히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존재한다/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지하고 기억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런 기억이 유의미해지기에는 사람들이 인식하는 세계가 지나치게 넓어졌기 때문이다. 작중에서처럼 가족 한 명 한 명의 노동력이 중요한 시대는 막을 내렸고 사람들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번호를 휴대폰에 수백 개씩 저장하고 다닌다. 평범한 수백 명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과 기억 받지 못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설령 그렇게 기억된다 하더라도 수십, 수백 년이 지나면 잊히는 것은 매한가지다. 우리가 프리다 칼로 같은 사람이 아닌 바에야 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억되는 것 그 자체보다는 (작중 헥토르가 취하는 태도처럼) 내가 내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르게, 얼마나 특별하게 기억되느냐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내 사람들'을 가족으로 한정 짓는 우를 범한다. 고조부가 음악가니까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나는 혈통주의,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의 꿈을 함부로 짓밟아도 되는 무신경함, 처자식의 생계는 아랑곳 않고 대책 없이 길을 떠난 무책임함은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용인된다. 가족에게 기억 받아야만 존재를 부지하는 세계라면 종묘사직을 목숨 걸고 지키거나 족보에 이름 석 자 올리려고 아둥바둥하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겠다. 그래도 가족 말고는 기억해줄 사람이 없는 삶이란 너무 비참하지 않을까. 가족도 가족 나름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있지만 가족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반면 나의 선택에 따라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내게 소중해지고 그들이 나를 기억해줄 수 있다. 오히려 그런 기억이야말로 그 사람의 삶이 괜찮았다는 것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기야 프리다 칼로는 자식이 없었고 작중 크루즈 또한 딱히 가족이 있다는 언급은 없지만 팬들이 바치는 어마어마한 공물을 받으면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런 걸 보면 작중 세계관에서 딱히 가족이 기억해줘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제한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혹은 그런 유명인이 될 자신이 없으면 가족이라도 있어야 존재를 부지할 수 있다는 일침일지도. 살아있지만 헥토르와 비슷하게 가족도, 세상도 기억해주지 않아서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느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가족영화라는 한계를 면피용으로 두르고 있으니,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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