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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2016) 현실은시궁창


특정한 사회적 현상을 다루는 이야기는 그 사회적 현상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 사회적 현상에서 보편적인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이야기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삼국지연의』가 서기 200년 즈음의 중국 왕조 교체를 다루고 있음에도 아직까지도, 심지어는 중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각자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인물들이 있고, 그 인물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논리가 보편적으로 충분히 납득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결함이 있더라도 능력만 있으면 발탁하겠다며 유재시거를 외친 조조. 신야에서부터 따라온 백성들을 버리지 못해 조조군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도망치기를 포기한 유비. 무능력한 유선 대신 왕이 되어도 좋다는 유비의 뜻을 한사코 거절한 제갈량과, 치열한 권력 다툼 끝에 실권을 거머쥐고 새로운 통일왕조의 기반을 닦은 사마의. 설령 반대 입장을 취하더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인물들이 무수히 등장하며, 그렇게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풍부한 이야기 덕분에 『삼국지연의』는 아직까지도 읽힐 수 있다. 재해석의 여지도 무한해 반복해서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졌고, 심지어 KOEI는 유선을 왕조보다 민중을 생각한 성군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82년생 김지영』에서는 안타깝게도 그런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김지영은 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녀에겐 사상도 신념도 의지도 행동도 없으며 하는 거라곤 오직 푸념뿐이다.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으면서도 분노하거나 항변하기는커녕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 참아 넘긴다. 항의하는 것은 언니인 김은영, 친구인 유나, 선도부에게 대든 여학생, 바바리맨을 잡은 일진, 사시에 합격한 여자 선배, 동아리 선배 차승연, 한숨을 쉰 두 번째 면접자, 김은실 팀장이다. 아니, 김지영이 화를 내는 유일한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남편 정대현이다. 고작해야 만만한 남편에게 투정이나 부리면서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징징대는 사람이 어떻게 매력적일 수 있을까? 차라리 『서프러제트』처럼 불이라도 지르고 때려 부수기라도 하면 나았을 것이다. 아마 작가는 세상에 이렇게 참아 넘기는 평범한 사람이 많다는 의도로 썼겠지만, 그러면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인내를 뒷받침해줄 근거나 감정에 대한 묘사라도 충실했어야 한다. 그러나 작가는 사건만을 지루하게 나열할 뿐이며 덕분에 김지영과 비슷한 경험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공감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도 쉽사리 발휘할 구석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김지영은 단순한 김지영이 아니라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지영이 차승연을 대변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대변했듯 그녀들 또한 김지영을 대신해 항거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녀들 역시 김지영을 둘러싼 체제에 일조한다. 어머니는 아들만 편애하고 김은영에게 교직을 권하며 김지영이 딸을 갖자 다음에 아들을 낳으면 된다고 말한다. 여자 일진이 괴롭히는 대상에 여학생이 포함되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동급생을 괴롭히지 않으면 왜 일진이겠는가?), 투표로 반장을 뽑는데 남자가 더 많이 뽑혔다는 건 여학생들 중에서도 남자 반장을 선호한 이들이 꽤 있었다는 뜻인데도 애써 얼버무린다. (그럼에도 김지영은 여자들이 더 똑똑하다며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첨언을 하는데, 민주적인 투표보다 성적 순으로 반장을 하는 게 더 정당하다는 논리인 것일까?) 여대생은 임신해서도 일하느라 지하철을 탄 김지영에게 마지못해 자리를 양보하며 타박하고 정대현의 고모는 애는 언제 낳느냐며 보챈다. 하지만 김지영은 절대 그녀들을 탓하지 않으며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체제에 대해서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악의 근원으로 묘사되는 것은 남자들이다.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다"는 말이 무색하게 작중에는 좋은 남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요소를 드러내기 위해서만 등장하는 아버지, 학생들 가슴이나 만지는 남선생, 바바리맨 남자, 스토킹하는 남학생, 구질구질한 동아리 남자들, 무례한 면접관과 클라이언트, 개방적이어봤자인 대표와 몰카나 돌려본 직장 남자 동료들, 자기 아내 아까운 줄은 알면서 미혼 여직원을 뽑으려는 정신과 의사. 김지영이 사귄 남자들도 기껏해야 헤어지고도 못 잊어서 쫓아다니는 찌질한 남자, 다른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고 삐지는 속 좁은 남자, 시집 어른들의 타박에 아내 편을 들기는커녕 김지영의 고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정대현 정도밖에 안 된다. 이런 남자들 때문에 그렇게나 "남자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았으면서 김지영은 왜 굳이 남자와 소개팅하고 사귀고 결혼하는 것일까? 남들이 결혼하니까 나도 결혼하고, 남들이 애를 낳으니까 나도 애를 낳는 흔해빠진 삶을 살면서 나는 남들과 달리 부당한 대접을 받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하다.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생활도, 일도, 꿈도" 전부 포기하기로 선택한 것은 자기 자신이면서 왜 남들을 탓하는가? 그렇게 될 줄 몰랐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면서.

작가가 지루하게 나열하는 사건들조차 지나치게 안일하고 작위적이다. 세계는 김지영을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져 있고, 괴롭힘의 주체는 소수의 여자와 대부분의 남자로 이루어져 있다. 여자가 김지영을 괴롭히면 김지영은 괴롭힘을 참고 견디며, 남자가 김지영을 괴롭히면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김지영 대신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준다. 이 구도가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그리고 작중 모든 인물들은, 심지어 김지영조차도 이 구도를 반복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남자가 나오면 이 남자가 김지영을 괴롭히겠구나 생각하면 되고, 이름을 가진 여자가 나오면 이 여자가 김지영을 도와주겠구나 생각하면 된다. 그들은 자신만의 논리도, 신념도, 동기도 없이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한 장치로만 쓰인 후 버려진다. 해설은 여성들의 연대를 말하지만 김은영, 유나, 차승연, 윤혜진, 김은실, 강혜수 모두 자기 역할을 마치고 나면 연대할 틈도 없이 이야기에서 퇴장한다. 그녀들은 김지영에게 뭔가를 베풀었지만, 김지영은 그녀들을 위해 한 게 뭐가 있는가? 이것은 연대가 아니라 시혜다. 여선남악女善男惡의 구도는 권선징악勸善懲惡에까지 이어져서, 아버지가 하려던 중국 사업은 까닭 없이 망하고 어머니가 추진한 부동산 투자와 죽집은 까닭 없이 성공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았던 똑똑한 여자 선배는 보란 듯이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온통 클리셰로 범벅된 터라 설마 이러겠어, 라는 예측은 여지없이 적중하여 실망감으로 이어진다.

나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기시감을 느꼈는데 영화 『특별시민』과 김선우의 소설 『캔들 플라워』 때문이었다. 『특별시민』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정치에 대해 떠올리는 온갖 나쁜 클리셰들을 욱여넣으려고 작정한 영화다. 그러려니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고 클리셰를 전개하는 장치로만 쓰이다가 매력 없이 버려졌다. (그래도 『특별시민』에는 인물 간의 치열한 대립이라도 존재한다.) 『캔들 플라워』는 광우병 사태 당시 촛불시위에 여성주의적 이야기를 넣어 전개한 소설이다. 촛불과 여성과 아이들이 절대선인 것처럼 묘사하면서도 왜 그런지에 대한 근거가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기에 깊이가 얕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방의 주장만 편 드는 작품은 동조자들의 자위 이상을 이끌어낼 수 없다.

"그동안 신입 사원을 받을 때마다 느낀 건데, 여자 막내들은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귀찮고 자잘한 일들을 다 하더라고. 남자들은 안 그래요. 아무리 막내고 신입 사원이라도 시키지 않는 한 할 생각도 안 해. 근데 왜 여자들은 알아서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라는 대사는 우습기까지 하다. 나는 남녀의 위치만 바꾼 같은 맥락의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일을 더 자발적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군대였다. 군대에서 사람이 얼마나 비자발적으로 변하는지 아는 사람들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남자가 일을 무조건 더 잘하고 여자가 일을 무조건 더 못하는 게 아니듯, 남자라고 무조건 나쁜 놈도 아니고 여자라고 무조건 착하지도 않다. 이 단순한 사실을 외면하는 작품은 잘 팔릴지는 몰라도 잘 쓰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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